김옥 개인전 <Midst of a Long Winter> 서문
생각의 라포르
우리가 새롭게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행하고 있는 행동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것은 주체적인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주체적이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주체적이거나 객체적인 것이라고 단순히 말로 뒤집어 표현할 수는 없다. 반응하는 모든 것을 수동적인 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듯이,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은 주체의 끊임 없는 존재증명이다.
김옥의 작업은 입체와 평면을 넘나든다. 여기서 넘나듦에 주목하는 이유는 구현의 폭이 넓다는 것 자체에 대한 찬사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과정 속에서 자신의 세계 안에서 관계를 맺어가려는 의지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그 안에는 고립도 있으며, 그것이 꼭 나쁜 것도 아니다. 신작 <Abyss>를 통해 작가가 고백하듯 불안과 깊은 성찰이 함께 하는 감정적 경험은 작업을 성숙하게 하며, 고유한 무엇으로 만들어낸다. 이는 진정성이나 성실성과 같이 다소 객관적으로 규정되곤 하는 태도로서의 수식을 넘어서는, 주체가 스스로 인지하게 되는 가치다.
이러한 기준으로 김옥의 작업을 대할 때, 그만의 형태를 만들기 위해 퍼부은 수행적 삶의 모습이나 시각적인 매료를 유발하는 추상적인 형태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작업의 동기부터 결과까지 작가가 추구하는 고유성이다. 가령 작업의 첫 동기가 되었다는 “늦가을 사찰 앞 연못 물에 잠겨있던 낙엽”과 같은 구체적 진술은 단지 자연의 보편적 속성에 보내는 찬사가 아닌, 재현에 대한 고유한 가치를 부여한다. 또한 전통 옻칠에 기반하면서도 현대적이고 장르 통합적인 자기만의 해석을 구현하기 위해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고 오로지 자기 스스로 통제해야 하는 작업 과정을 감당하고 있다. 이는 발표와 함께 큰 주목을 받은 <Merge Series>(2016~)에서 시작해 최근 <소원의 겹>(2023~)에 이르기까지 김옥이 좌고우면하지 않고 탐구해온 세계이다. “작가는 작업으로 말한다”는 말이 의외로 평범한 교훈이나 자신감의 표현 정도로 쓰이곤 하는 것을 생각해볼 때, 김옥의 작업은 결코 그러한 용도로 쓰일 것이 아님을 잘 보여준다. 다양함 자체보다는 고유성을 적절하게 변주하고 배치한 상황 속에서 관람자는 작가가 그러했듯 작업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이로써 평면과 입체, 과거와 현재라는 이분법적 경계는 사라지고 ‘관계하는 주체’만이 남는다.
어쩌면 김옥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발견하고 또한 발견하고자 했던 것은 그러한 관계의 실체였는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창의적 구현 방식과 수많은 겹으로 이루어진 작업들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작업중’인 여러 형태들이 있었다. 어떤 형태들은 아직 옻나무에서 추출한 진액이 정제되지 않은 상태인 생칠만 한 것들이었고 어떤 형태들은 옻칠과 토분을 배합한 토회를 덧바르며 톤이 달라지는 효과를 가늠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이전 같으면 ‘끝’을 향해 나아가려 했던 작가는 어느 날 ‘새로운 시작’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스스로 그 생각에 대한 신뢰 관계 형성이 필요했다. 문두에도 밝혀 두었 듯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동반하며, 주체적이거나 주체적이지 않은 순간들을 모두 요구했다.
라포르(rapport)는 본래 프랑스어로 ‘가져오다’에서 유래, 환자와 의사 사이의 심리적 신뢰관계를 뜻하는 말이다. 이는 심리학과 교육학의 영역으로 확장하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 신뢰관계를 통칭하는 의미를 띠게 되었다. 필자는 김옥의 작업에서 여러 시간에 걸쳐 있는 작가의 생각들이 그 과정에서 발생한 경험과 결정들로 단단해지는 라포르를 발견하면서, 이것이 구축하는 관계의 형태들이 시각적인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요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여기에 ‘미완성’의 잣대는 사라지고 새로운 아름다움의 시작으로 인지된다. 모든 날에는 사실 시간이라는 연속적 경계만 있을 뿐 새벽이 밝아올 때마다 새롭게 인지될 뿐이라는 <Dawn>(2024)의 메시지가 그렇듯, <소원의 겹>에서 퍼즐처럼 맞물려 있는 형태들이 가만 보면 어떤 완결성보다는 끝 없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있듯 아름다움의 실체는 사실 고정된 것이 아닌 차이와 상호 연관성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양가적 속성은 2020년부터 연작을 내온 <항해의 여정>에서도 극적으로 드러난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과, 희망을 상징하는 푸른 바다를 이어주는 것은 무언가를 용기 있게 전환하고자 하는 용기일 것이다. 작가는 10여년 전 저널리즘적 경험과 관점에서 시작된 생각들이 생각의 라포르를 거쳐 작업 안에서 관계를 이루었으며, 오늘날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가 해쳐 나가고 있는 이 시기에 용기와 간절함을 시각화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작년엔 CNN에 “Spirit of Seoul”이라는 코너를 통해 한국의 주목할만한 옻칠 작가로 소개된 바 있는 김옥이 미술시장에서도 국내를 넘어 해외에도 물리적, 정신적 관계를 틀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불확실의 시대를 끌어안는 예술의 힘을 기대해본다. 그래서 ‘고유성’이란 고정되고 정합적인 형태가 아니라 의도치 않게 계속 무언가를 발견하며 끊임없이 증명해 나가는 관계 의지라는 것을 보다 많은 이들이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글/배민영(예술평론가)